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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은 푸르고 버터는 노랗다
    ∀일상 2022. 9. 27. 00:59

    바야흐로 가을이 왔으니, 찬 공기가 아침을 깨우고 알록달록한 가로수가 산책을 부른다. 부지런히 옷을 주워 입고 둔한 발걸음으로 향하는 곳은 Lindner. 다른 게 아니라 버터를 사러 가는 길이다.

    U-Bahn(지하철)이나 빵을 파는 Naturbäckerei에 가려면 대문을 열고 나와 오른쪽으로 향해야 하지만 이번엔 왼쪽으로 향한다. 다른 풍경만큼이나 설렘이 가득하다.

    Lindner에 다다랐을 때쯤 귀여운 서점 앞 편지지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가판대를 돌려가며 열심히 구경하다가 문득 서점 안을 들여다봤다.

    유리창에 비친 가로수와 서점 안에 걸려 있는 그림 때문인지 숲 속 서점에 온 기분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책보다는 소품이 눈에 띈다. 이 방 하나를 통째로 사고 싶다. 계획에 없던 지출에 좀 더 엄격하게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골랐다. 현관 앞에 두고 열쇠 보관함으로 쓸 요량이다.

    6-12세 어린이들이 읽는 책도 한 권 골랐다. 외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땐 느리고 서툴어 답답하지만 좋은 점도 하나 있다. 다 커서 보기엔 시시한 책도 흥미진진해진다는 점이다. 언어만 어린이가 되는 게 아니라 생각도 어린이처럼 하게 되나 보다. 마침 책과 나무 상자가 점원이 꺼낸 종이가방에 딱 들어맞는다.


    곧 도착한 Lindner. 저 사진 오른편 먼 곳에 보이는 게 버터이다. 매장에서 만든 신선한 버터를 나무주걱으로 덜어내 종이에 싸준다. 나는 무염버터 250g을 주문했다.

    버터도 샀으니 이제 빵을 사러 Naturbäckerei로 간다. Lindner에서도 빵을 팔지만 비싸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Laugenzopf가 없다. 버터는 Laugenzopf나 Splitterbrötchen에 발라 먹는 게 제일 맛있다.

    집에 오자마자 버터의 옥안부터 살핀다. 당장 빵에 버터를 발라 먹고 싶지만 온갖 자제력을 동원해 손부터 씻고 커피를 내린다. 커피 사진을 찍을 자제력까진 없다.

    빵에 듬뿍 바른 버터는 마트에서 사 먹는 버터보다 더 부드럽고 풍미가 좋다. 온몸에 있는 감각이 모두 혀와 코에 집중된 듯 고소한 버터향과 맛이 흐드러진다. 이만하면 버터 찾아 산책 다닐만하다.

    Lindner에서 산 Schnitzel과 cottage pie
    cottage pie

    처음 먹어본 cottage pie. 영국 음식은 다 맛없는 줄 알았는데... 입 안 가득 차가운 감자와 고기가 씹힌다. 맛있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 나무상자에 열쇠를 넣어보니 잘 맞는다. 목재라서 열쇠를 넣을 때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소파에 누워 서점에서 샀던 책 삐삐롱스타킹을 펼쳐 본다. 첫 장부터 너무 슬프잖아 ㅜㅜ 삐삐가 너무 가엾다. 그러고 보면 다음 주 시험인 내가 더 가엾다.

    후... 신선놀음 그만하고 공부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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